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안문 6.4 항쟁 (문단 편집) === 5월 20일 === 5월 20일,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된다.''' 중국 당국은 계엄령을 내린 후 약 5만명의 대군을 베이징에 투입했으나, 예상 외로 시민들과 학생들의 강한 저항으로 교외에 머물러야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계엄 집행의 임무를 받은 인민해방군 장교들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을 보고 듣지도 말고 오직 공산당이 발표한 <4.26 사설>만을 보도록 명령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군중들을 진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한편 이 시기 시위대에게 포위된 인민해방군에게 시위대측은 군인들에게 시위대를 지지하기를 호소했고, 시민들은 오히려 포위된 병사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반대로 진압명령이 떨어지기 전 천안문광장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학생이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돌보거나 군차량으로 병원에 후송시키곤 했다. 이렇게 군과 인민이 서로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고, 1970~80년대 악랄한 정부의 민주화 시위 탄압을 겪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이 공산 국가라지만 저렇게 국민을 사랑하는 점은 배워봄직하다."는 여론이 강세였으나, '''그 끝은...''' 결국 중국 공산당은 바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군중들에게 천안문 광장을 비울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결국 당내에서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된다. 시위대 내부의 지도층에서도 군대가 베이징 시내를 장악하자 위험을 느끼고 해산할 것을 논하기도 했으나,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강경 급진파 세력이었다. ||[YouTube(HAUo4kBkTvU)]|| || 당시 [[신문연파]] 보도.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